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잔 다르크/생애 (문단 편집) == 이단 재판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이단 재판에서 남장을 한 잔 다르크_Louis-Maurice Boutet de Monvel.jpg|width=100%]]}}}|| || {{{#ffe24b '''잔 다르크와 이단 재판[br](, 루이 모리스 부테 드 몽벨(Louis-Maurice Boutet de Monvel) 작, 1896년, 책 삽화).'''}}} || 파리로 호송된 잔 다르크는 당시 잉글랜드파 및 부르고뉴파에 소속되어 있던 파리의 이단심문관들에게 넘겨져 이단 재판을 받았다. 흔히 잔 다르크가 마녀재판을 받았다고 하나, 실제로는 이단재판이었다. 이 재판을 위하여 [[피에르 코숑]] 주교가 이끄는 무려 70여 명의 이단심문단이 만들어졌으나 잔 다르크의 혐의를 입증하거나 자백을 받아내는데 실패했다. 주교 이하 [[신학]] 전문가 70명이 달려들었지만, 말 그대로 일자무식인 시골 소녀 한 사람에게 말빨로 발린 셈이다. 1대 70이라는 수적인 열세, 재판 성립부터 과정까지 당시 기준으로도 말도 안 되게 잔 다르크에게 불공평했던 상황이었던 것은 물론, 건강까지 악화된 상태인 등 모든 면에서 잔에게 극도로 불리한 조건이었음에도 말이다. 잔 다르크에 대한 이 재판의 특이한 부분은 바로 첫 번째 재판은 공개재판으로 했지만, 그 공개 재판에서 얼마나 심하게 잔 다르크에게 발렸는지 다음 재판부터는 비공개 재판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재판 과정의 자세한 기록들이 오늘날까지 남아있으며, 논리정연하고 침착한 대응으로 인해서, 해당 내용에 의거해서 잔 다르크가 정신병을 가지지 않았다는 유력한 증거로서 사용되고 있다. 잔 다르크는 "검과 깃발 중에 어느 것이 더 좋냐"는 질문에 사람을 죽이는 것을 피하고 싶어서 깃발을 들었으며, "한 번도 사람을 직접 죽인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있느냐"는 질문에는 "만약 제가 은총 상태에 있지 않다면 하느님께서 제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만약 제가 은총 상태에 있다면 하느님께서 제게 계속해서 은총을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했다. 은총을 받았다면 함부로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없다고 몰고 갔을 것이고 반대로 은총이 없다고 말하면 저주에 들렸다고 몰아갈 의도로 파놓은 함정이었지만, 도리어 종교재판관을 당황하게 만든 것이다. 또 "[[미카엘]] 대천사에게 털이 있냐", "천사가 옷을 입었냐" 등등 천사의 외형에 관한 질문도 함부로 외형을 논하면 이단으로 몰릴 만한 질문이나, 오히려 상대에게 외형에 대해 역으로 논하게 만드는 답변을 했다. 글을 전혀 모르는[* 전술했듯 성녀로 활동하기 시작하고서부터 좀 배우기는 했는데, 결국 자기 이름을 쓸 줄 아는 게 고작이었다.], 즉 수사학에 대한 지식을 구하기 매우 힘든 상태인 어린 소녀가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었던 사제들의 악의적인 추궁을 물리친 건데, 현대적으로 비유하자면 [[무학]]의 미성년자가 변호사 한 명 없이 혈혈단신으로 당대 최고의 재판관과 검사를 상대로 재판을 대등하게 벌이는 정도이다. 그 일부를 직접 살펴보자. 다음은 실제로 코숑 주교를 비롯한 재판관들이 던졌던 질문과 그에 대한 잔 다르크의 답변을 간추려서 재구성한 것이다. ||문. [[주님의 기도]]를 이 자리에서 외워, 그대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임을 증명하라.[* 이 당시엔 [[성경]]이 번역되지 않았고, 기도문과 [[미사]]가 모조리 [[라틴어]]였다. 자국어로 미사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은, [[1960년대]]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부터다. 오늘날처럼 [[의무교육]], 제지술, 인쇄술, 유통 등이 발달하지 못해, 책을 가질 수 있는 사람,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다. 심지어 [[성직자]]와 [[수도자]] 중에도 라틴어를 잘 모르는 사람이 있었다. 중세의 [[문맹률]]은 꽤 높았기 때문이다.] 답. 주교님께서 저의 [[주님의 기도]] 암송을 들을 만큼 독실한 신자임을 신앙고백하여 먼저 입증하세요. 문. 다른 성직자들을 불러서 암송하게 하겠다. 답. 저에게 질문하신 주교님께서 직접 하셔야 합니다. 문. 넘어가겠다. 문. 법정에서 항상 진실만을 말할 것을 맹세하는가? 답. 저는 언제나 진실을 이야기할 것이지만, 필요하지 않은 부분에는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문. [[천사]]의 목소리를 얼마나 자주 듣는가? 답. 제가 필요한 때에 못 들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문. 그대가 목격했다는 천사들이 옷을 입고 있던가? 답. '''주님께서 천사들에게 옷을 입힐 능력이 없다고 믿으시는 건가요?''' 문. 성 [[미카엘]]의 몸엔 털이 나 있던가? 답. '''그럼 밀어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문. 성녀 마르가리타는 [[프랑스어]]로 말을 하던가? 답. '''성인들이 [[잉글랜드]]의 편에 서 있지 않은데 왜 [[영어]]로 말을 하겠습니까?''' 문. 그분께서 [[잉글랜드]]를 미워하신다는 말인가?[* 긍정한다면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으로 모두를 사랑하시는 분인데 그 사랑을 부정했으니 죄인이고, 부정한다면 미워하지 않으신데 너가 존재하니 너는 하느님의 뜻을 어기는 사람이라는 죄목을 뒤집어 씌울 수 있는 날카로운 질문이다.] 답. 저로서는 하느님께서 잉글랜드인을 미워하는지 사랑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분께서 잉글랜드인들을 [[프랑스]]에서 쫓아내시리란 것만은 압니다. 문. 천사들 앞에서 [[순결]]을 맹세했던데, 만약 그대가 [[결혼]]하면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될 거라 보는가? 답. 그것은 지금으로선 저도 알 수 없으나, 저는 우리 주님을 믿습니다. 문. 천사들이 그대가 심판받을 것이라고 미리 위험을 경고해주진 않던가? 답. 제가 무슨 위험에 처해 있나요? 천사들의 목소리는 재판하는 동안 제가 자유로울 것이라 말했습니다. 저의 것이 될 천국을 위해, 저의 [[순교]]에 대해 불평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문. 지금이라도 도망칠 생각은 없는가? 답. 문이 열려 있으면 나가야지요. 그것은 주님께서 허락하셨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문. 왜 남자의 옷을 입고 다니는 금기를 저질렀는가? 답. '''옷보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일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사제복과 법복을 입은 사람들을 비꼰다고 볼 수 있는 대답.] 문. 왜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한낱 소녀인 그대에게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냈다고 생각하는가? 답. '''그 한낱 소녀를 쓰는 것이 그분의 기쁨입니다.''' 문. 어떤 상황이건 그대가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가?[* 이 또한 예 아니오로 대답한다면 "하느님의 은총=하느님의 뜻에 대해 감히 관여하려 한다"는 죄목을 뒤집어 씌우기 딱 좋은 질문이다. 가톨릭 [[칠죄종]] 중 오만의 대표사례가 감히 하느님의 뜻에 대해 개개인이 단언하려는 것이 대부분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어느 상황이건 기도하겠다"는 독실함으로 받아쳐버렸다.] 답. 그분의 은총을 받지 못했다면 제게 내려주시기를, 은총을 받고 있다면 그분께서 계속해 주시기를. 그분의 은총하에 없다는 것을 제가 알았다면, 저는 세상의 가장 슬픈 존재입니다. 문. 피고가 행한 일에 대해 교회가 내리는 결정에 승복하며 순명하겠는가? 답. 저를 보내신 주님과 동정녀 [[성모 마리아]]와 천국의 모든 성인의 뜻에 순명하겠습니다. 저는 교회를 사랑하지만, 당신들은 저를 심판할 권리가 없습니다. 제 말과 행동은 모두 주님과 그분의 천사들에게만 호소할 뿐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저를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문. 교회의 결정에 불복하겠다는 말인가? 답. '''여러분, 제가 보기엔 주님과 교회의 뜻은 하나입니다. 따라서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 문제를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은 바로 당신들입니다.'''|| 결국 이렇다 할 혐의를 입증해내지 못한 코숑 주교는 마지막으로 잔 다르크에게 [[남장]] 혐의를 추궁했다. 죄라고 절대 할 수 없는 전혀 말도 안 되는 이유지만, 괴상하게도 당시에는 여성이 남장을 하거나 남성이 여장을 하는 일은 [[동성애]] 예비음모로 보아 성경에 위배되는 종교적 범죄였다.[* 여자는 남자의 옷을 입지 말고 남자는 여자의 옷을 입지 마라. 이런 짓을 하는 자는 모두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역겨워하신다.([[신명기]] 22:5)] 이에 잔 다르크는 "순결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잔의 재판 이전에 순결을 지키기 위해 남장을 한 여성이 무죄 판결을 받은 사례가 이미 있었으므로, 잔의 주장은 정상적인 재판이라면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그러나 재판 자체가 교회법적으로 문제가 많았다. 대표적인 것만 예를 들자면 먼저 종교재판의 판사 노릇을 하려면 일종의 자격증 같은 것이 필요했다. 하지만 코숑은 [[그런거 없다|그런 게 없었다.]][* 한 예로 잔 다르크가 붙잡힌 곳은 콩피에뉴고, 코숑의 교구인 보베는 그 콩피에뉴와 인접한 곳이기에 명목상 그가 자기 교구 가까에에서 체포된 잔 다르크를 재판했다. 그러나 재판은 보베가 아니라 루앙에서 열렸는데, 물론 루앙이 프랑스 내 잉글랜드 점령지 중에서 가장 안정적인 탓도 있지만 보베는 이미 잔 다르크의 활약 때 잉글랜드와 부르고뉴가 아니라 프랑스의 관할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원칙대로 보베에서 재판을 하면 코숑이 오히려 체포당할 판국이었다. 그래서 보베의 주교가 자기 교구가 아닌 루앙에서 재판을 하는 촌극이 벌어진 것이다.([[https://books.google.co.kr/books?id=rwNkZ6j0MawC&pg=PA100&lpg=PA100&dq=Joan+of+Arc+Surrender+Beauvais&source=bl&ots=hmkwffoaeS&sig=Piq6L1phOqcdWLQlprchR30ygJ4&hl=ko&sa=X&ved=0ahUKEwi3udiV_67JAhXEhaYKHSU6BE0Q6AEINjAE#v=onepage&q=Joan%20of%20Arc%20Surrender%20Beauvais&f=false|링크]])] 또한 잔 다르크에게 불리한 증거나 증언이 나오지 않았다면 재판을 열 수가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는 "일단 재판부터 열고 보라"는 지령을 내려보냈고, 잉글랜드 측은 70명에 달하는 법률 고문들의 도움을 받으며 재판에 임했지만 잔 다르크 측에 유리한 증인이 1명도 없었다. 잔은 이것을 알아차리고 이의를 제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이 또한 교회법을 어기는 일이었음은 당연. 불리한 상황에 처해진 잔은 [[교황청]]에 항소를 신청했지만[* 당시는 [[교황]]들이 분열되어 있던 시대인데, 잔 다르크는 로마의 교황을 지지했다. 잔 다르크의 재판이 있었을 당시 로마 교황 [[마르티노 5세]]가 사망하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을 때고 그래서 윈체스터 추기경과 친잉글랜드파 프랑스인 보베 주교 [[피에르 코숑]]이 정치적으로 제멋대로 재판을 진행할 수 있었다. 물론 잔 다르크의 항소 시도 자체가 막혔고, 교황청에 전달되었다고 한들 잔 다르크의 운명이 크게 바뀌었으리라 장담하기는 힘들었지만 말이다. 나중에 명예회복 재판은 [[교황청]]에서 정식으로 열었다.] 재판정에서는 이를 저지했다. 게다가 재판에서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잔의 고향 동레미의 조사관으로 보낸 니콜라 바이이는 잔에 대한 나쁜 소문이나 증거를 전혀 얻지 못했다. 결국 코숑은 바이이가 빈손으로 돌아오자[* 어떻게든 목적을 달성해야 하는 조사관이 빈 손으로 돌아왔다는 것도, 잔과 그 집안이 신앙적으로나 평소에나 마을에서 꽤나 평판이 좋았다는 얘기다. 잔과 그 가족들이 평소에 부농이라고 제멋대로 하고 다녔으면 같은 고향 사람들이라도 원한을 가졌을 테고, 조사관이 온 틈을 타 잔에 대해 나쁘게 말하거나 동네 교회 사람들도 뭔가 한 몫 하고 싶어서 잔이 이단이라고 말했을 테니깐 말이다.] 그에게 화를 내고 욕을 퍼부으며 여행 경비[* 정확히 말하면 수고비.]를 주지 않았다. 이윽고 코숑 측은 잔 다르크를 도와주려는 사람들에게까지 위협을 가하기 시작했다. 푸아티에의 종교심문에서 잔에게 문제가 없다는 걸 환기시킨 성직자 니콜라 드 우프빌은 감옥에 갇혔다가 영향력 있는 친구의 보증으로 겨우 풀려났다. 재판 자체의 정당성에 이의를 제기한 장 로이에라는 성직자는 살해 위협을 당했고, 결국 로이에라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로마로 도망치고 만다. 또한 잔의 고향 출신으로 꾸며낸 사람을 독방에 갇힌 잔에게 보내어 위로하고 대화하는 척하며, 엿보기 구멍을 통해 잔에게서 이단으로 보일 수 있는 말이나 행동을 얻어내려는 수작까지 부렸다. 그나마 이상베르 드 라 피에르와 마르탱 라드브뉘라는 사람들은 잔을 이단자라고 여기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녀의 목숨만은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감옥에 여러 번 찾아와 회개하라며 잔을 설득하려고 했다. 하지만 코숑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두 사람에게 해명을 요구하며 닦달했고, 심지어 워릭 백작은 드 라 피에르에게 "센 강에다 던져버리겠다"고 말했다. 즉 "잔을 조금이라도 도우려는 의도가 보이면 죽여버리겠다"는 뜻이다. 다만 이들이 잔 다르크를 처음부터 죽이려고 재판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 잔 다르크의 재판은 처음엔 공개재판을 통해서 그녀에게 엄청난 망신을 주고, 그 권위를 깎아내림으로서 잔을 농락해 무력화시키는 것에 중점을 뒀다. 아무리 중세 시대라고 해도 일반적으로 잔 다르크에게 내려진 범죄 혐의만으로는 사형을 언도할 수 없었다. 특히 샤를 7세가 잔 다르크에게 무관심했던 이유 중 하나도 "잔 다르크를 별 것 아닌 일로 사형시킬 순 없다"라고 여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잔 다르크의 사형 소식에 프랑스 전체가 충격에 빠졌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잔의 죄목은 어처구니가 없었기 때문에 잉글랜드도 이 재판의 부조리함을 모르지는 않았다. 문제는 첫번째 공개재판에서 오히려 잉글랜드 측이 개박살나서 이후 모든 재판이 비공개 재판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당시 기록된 재판 내용을 토대로 보면 잔 다르크가 굉장히 논리 정연하고 좋은 대응을 했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죽일 생각이 없이 모욕하고 권위를 떨어뜨릴 생각이었지만, 재판이 진행되어감에 따라서 잉글랜드에 협력하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라는 극단적인 선택지만 남게 되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당연히 잉글랜드 및 부르고뉴파의 시각에서 진행된 재판이 공정하기는 힘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당파도, 잔 다르크의 요청으로 당시 재판관이 프랑스 왕실에 잔이 바라는 증거물들을 제출하라고 요청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잔 다르크를 구할 만한 문헌 기록 및 증거자료들을 전혀 제출하지 않았다. 또한, 당시 프랑스는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이미 잉글랜드군 총사령관인 탈보트를 포로로 붙잡은 상태였다. 당시 잉글랜드군 측은 탈보트와 잔 다르크를 교환할 의사도 있었지만 당시 관례였던 포로 교환 제의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몇 년 후 잔 다르크의 부하이기도 했던 프랑스 장군 장 포통 드 생트라유가 붙잡히자 바로 포로 교환을 제의해 성사시켰다.[* 풀려난 탈보트는 이후 뛰어난 지휘로 프랑스군을 계속해서 물리치며 백년전쟁의 조기종결을 막다가 마지막 [[카스티용 전투]]에서 전사한다. 헨리 6세 1부와 오를레앙의 처녀 등의 작품에서는 잔 다르크의 강력한 맞수로 나온다. 이렇게 적이지만 프랑스인들에게 인상을 크게 남겼는지, 그가 주둔했던 [[보르도]] 지방에는 그의 이름을 딴 샤또 딸보라는 [[와인]]이 있다고. 여담으로 [[거스 히딩크]] 감독이 좋아하는 와인이라고 한다.] 이걸 봐도 사실상 샤를 7세는 잔을 구해줄 생각 자체가 없었고 아무것도 안 한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오를레앙 시민들이 자신들을 구한 잔 다르크를 구해내기 위한 몸값을 자발적으로 모금하자 그걸 몰수해버렸다.[* 이 외에도 구출 시도가 없던 건 아니어서 잔 다르크의 전우 라 이르가 잔 다르크가 갇혀 있는 루앙으로 군사를 이끌고 닥돌했지만 실패하고 포로가 되고 만다. 한편 이 구출대의 배후에 [[질 드 레]]가 있다는 설이 있다. 라 이르는 나중에 풀려났지만 잔 다르크는 끝내 구출되지 못했다.] 다만 잉글랜드가 잔 다르크를 1만 리브르 트르누아나 혹은 1만 파운드라는 거금을 들여서 데려온 포로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프랑스에 억류되어 있는 잉글랜드인 포로 중 1만 리브르 트르누아나 1만 파운드의 가치가 있는 포로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잉글랜드 지배하의 노르망디에서도 잔 다르크를 손에 넣기 위해 특별세를 도입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 어머니 [[이자보 드 바비에르]] 대비는 한술 더 떠 잉글랜드에 [[http://nobody2005.web.fc2.com/jyunkyou/seijan/irasuto/jeanneirasuto2.html|잔 다르크를 죽일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다만 이자보 대비는 트루아 조약 이후 부르고뉴파를 지지하였기에 아들 샤를 7세와 관계가 좋지 못해 적대적 수준으로 거리를 두고 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역사가 줄리엣 바커는 잔 다르크의 재판은 공정하고 합법적이었으며 잔은 이단의 혐의를 결코 피할 수 없었고 잔의 편을 드는 사람도 많았다고 주장하지만, 이 사람이 잉글랜드 사람이고 자신의 저서에서 아쟁쿠르 전투 등 잉글랜드의 승리를 강하게 묘사하고 잔 다르크가 나오는 책 제목도 "정복(Conquest)"으로 다분히 잉글랜드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위에 있는 언급처럼 그 당시에 내부에서조차도 공정하지 않다고 비판이 있었던 재판이었고, 영국인 변호사 브라이언 해리스도 자신의 저서 인저스티스에서 잔 다르크의 재판을 두고 사법살인이라고 비판했다. 이후 프랑스 왕당파 학자들은 이 재판을 맹렬히 비난했다. 재판을 받을 때 잔은 "7년 안에 오를레앙에서의 패배보다 더 큰 재앙이 잉글랜드에 닥친다"고 경고 혹은 예언을 했는데, 단순히 전투에서의 참패는 아니었지만 정말로 잔의 죽음 몇년 안에 잉글랜드 왕의 섭정 베드퍼드 공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급사하고, 아라스 조약에 의해 부르고뉴파가 프랑스 왕실에 협력하면서 파리까지 잃게 된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Joan_of_arc_interrogation.jpg|width=100%]]}}}|| || {{{#ffe24b '''감옥에서 심문을 받는 잔 다르크를 그린 그림인 감옥에서 윈체스터의 추기경에게 심문을 받는 잔 다르크[br](Joan of Arc is interrogated by The Cardinal of Winchester in her prison, 폴 들라로슈(Paul Delaroche) 작, 1824, 캔버스에 유화). 원본 그림은 19세기 이래 프랑스 미술관 Musée des Beaux-Arts de Rouen에 전시되어 있다.'''}}} || 잔은 고문과 화형 위협을 포함한 협박을 받아 교회의 처분을 따르겠다는 문서에 서명했다. 잔 다르크도 재판이 진행될수록 점점 총명함이 사라지고 증언이 오락가락하고 빌미를 잡힐 만한 말이 나오는 등 약간 실수를 범하기도 했는데, 나이 어린 소녀를 험악한 감옥에 가두고선 심심할 때마다 재판에 관련된 사람들이 [[인신공격]]과 고문 위협을 비롯한 협박 등으로 [[가스라이팅|정신적 고통을 지속적으로 주니까]] 정신이 멀쩡할 리가 없다. 잔은 [[문맹]]이었으므로 자신이 어떤 문서에 서명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 때 잔이 살짝 웃었다고 하는데, 도대체 무슨 의미였는지 알 수 없다. 일단은 살아났다는 기쁨일 수도 있겠지만, 문서의 내용을 짐작하고 자신의 신념을 포기했다는 허탈함과 [[멘탈붕괴]]로 쓴 웃음을 지었을 가능성도 있다. "서명하면 [[수녀원]][* 원래 잔처럼 종교재판을 받는 여성은 [[수녀]]들이 관리하는 [[수녀원]]에 수감시켜야 한다. 그러나 잔은 잉글랜드에 넘겨지고 나서 처음부터 남자 간수들이 관리하는 군사 감옥에 갇힌다. 이것은 매우 불공평한 일이다. 물론 수녀원에 수감되어도 엄격하거나 종교적으로 강한 신념을 가진 수녀들이 있었다면 잔 다르크를 호의적으로 대했을지, 아니면 괴롭혔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최소한 군사 감옥보다는 대우가 나았을 것이다.]에 감금한다"는 약속과 달리, 여전히 군사 감옥에 가둬놨고, 여자 옷을 입게 하고선 병사들을 보내 위협을 가했다. 이 상황에서 순결을 지키지 못하면 악마와 관계를 맺은 마녀로 몰 것이 뻔했다. 결국 자신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잔은 남자 옷을 다시 입을 수밖에 없었고, 그걸 빌미로 재판정은 이단 판결을 내린다. 가혹한 감옥 생활로 병에 걸린 잔은 화형 선고가 아니더라도, 감옥에 계속 갇혀 있으면 병으로 목숨을 잃을 확률이 높았다. 설령 종교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어도 잉글랜드에게는 군사재판이나 정치재판을 통해 포로나 반역자라는 죄목으로 처형하는 방법, 또는 독살이나 암살 등의 방법도 충분히 있었다. 그럼에도 굳이 잉글랜드 측이 잔을 이단자이며 마녀로 몰아 종교재판을 고집한 이유는, 잔이 감옥에서 자연사하거나 다른 죄목으로 처형당하거나 암살당하면 프랑스 측에게 오히려 영웅의 이미지로 민중들에게 보일 수도 있고, 샤를 7세의 위신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단자나 마녀로 몰아서 죽이면 샤를 7세의 위신 실추가 제대로 될 것이고, 다른 처형 방법에 비해서 민중들의 반발심이 상대적으로 적었음을 계산한 일. 물론 결과적으로 이 계산은 소용없게 되었다. 오히려 역효과만 제대로 불렀을 뿐이다. 만약 잔 다르크가 화형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확실하게 인정한 수감자로 계속 남았으면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더니 목숨을 위협받자 바로 포기하고 죄를 인정한 어리석은 소녀"라고 조롱거리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잔 다르크가 화형에 처해질 때 오히려 경건한 태도를 보이는 바람에 기존에 잉글랜드에 반대하던 프랑스인들의 반잉글랜드 감정만 제대로 불러일으키고 잉글랜드는 어린 소녀를 석연찮은 재판으로 잔인하게 죽였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